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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기

괴시리 전통마을, 목은 이색 생가터

방우식 2018. 5. 21. 05:29

일시; 18년 3월25일
위치;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고려말 충신이자 재상으로 충절을 지킨 목은 이색선생,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요번 해파랑길 22코스를 답사하며 그의 외가이자 탄생한 괴시리 전통마을 생가지를 스치듯 들르게 되었다.

영해면 소재지에서 북동쪽 해안방향으로 1km 남짓, 반듯한 고와가들이 즐비한 전통마을로 '八'자 모양으로 마을이 형성 되어있는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마을 앞에는 영해 평야의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이 흐르고 있다.
원래 괴시리는 호지라는 작은 못이 있어서 호지마을이라 하였다는데, 고려 공민왕 8년, 중국 원나라에 다녀온 목은 이색이 마을의 지세가 중국의 괴시와 흡사하다 하여 괴시라고 하였다고 한다.
호지라는 원래 있는 이름을 엉뚱한 중국의 마을 이름으로 바꾸어 버린것은 사대사상에 젖은 이색의 한 단면이 보이는 듯 싶은, 참 씁쓸하고 찝찝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유허비각, 가정 이곡선생과 목은 이색의 유적을 추모하는 비

목은 이색 선생의 외가가 처음 입주한 이래, 인조8년 1630년부터 영양남씨가 처음 정착하여 점차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후 380여년이 흘렀다고....

조선후기 영남지역 사대부가의 원 형태로, 300년된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을 비롯, 많은 고택과 서당, 정자 등, 14점의 국가 및 도 지정 문화재가 있다고 한다.

목은 이색 선생 생가터 입구, 기념관은 2006년 06월에 준공했다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년~1396년)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영숙,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이다. 찬성사 이곡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야근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목은 이색 기념관

성리학을 고려에 받아드리고 새로운 사회의 개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하고...정몽주, 정도전, 유창(劉敞)등의 스승이었다
당시 그의 제자들과 성리학자들은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다가 1396년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여주의 신륵사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이 한다

무가정지의 한쪽에는,"가정 목은 양선생 유허비(稼亭 牧隱 兩 先生 遺虛碑) 비석이 있는데..., 

비석에 가정(稼亭)은 목은의 부친 이곡이다.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1334년 본국으로부터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한때 시관이 되었으나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다가 충정왕이 즉위하자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다음 백과---

무가정지란 말이 무슨 말인지...?, 집이 없어진 터란 뜻인 듯 싶기도...

관어대가 있는 영덕 상대산/183.7m
우측길은 대진항과 도해단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 길은 송천변을 따라 고래불 대교와 대진 해수욕장 가는 길이다.

도로 가에 있는 요 건물은 들여다 보지는 않았지만 '상여 집'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