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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기

박상진의사 생가

방우식 2013. 8. 13. 18:55

일시; 13년 08월07일 수요일

동행; 마눌

위치;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일제 강점기 시대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치고 희생을 하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가난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독립운동 지금을 지원하고 독립 운동가들의 피신처가 되어주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국외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소문으로 듣거나 보도를 통하여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자신만의 안일을 위해 기회를 따라 처신을 하며 나라를 배신하고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지금도 부유하게 잘 살고 있으며 각계 지도층에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년 전 각종 매스컴을 통하여 보도 되기도 했었는데 우리나라 역사의 한편으로는 첮 단추 부터 뭔가 잘못 꿰어져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을 하다가 짧은 생을 살다가 간 '박상진 의사'에 대해서는 매스컴을 통하여 알려진 것 이외에 그의  행적이나 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이 막연히 울산출신으로 독립운동으로 생애를 바쳤다는 것 밖에 아는 것이 전혀 없는데...

오늘 무룡산-동화산 산행을 시작하는 깃점 송정호수으로 가는 여러갈래의 접근로 중에 송정마을 입구에서 시작하는 길에서 약간 비켜 서 있는 의사의 생가를 찾게 되었다.

 

07시55분, 울산공항 앞 지하도를 지나 송정 버스정류소에서 시내버스를 하차하고 '지당3길' 입구에 서 있는 '박상진의사 생가 입구' 안내판을 보고 길을 따라 들어간다.  

07시59분, 중앙선 철도를 건너면서 곧 바로 안내판이 가르키는데로 우측 길을 따르고

08시02분, 요기에서 좌축 도로를 따라야 하는데 이길의 명칭이 '박상진 길' 표시판이 걸려 있다.

부근의 농지는 농민들의 손에서 매각되어 토지개발이 진행중으로 농작물을 볼 수가 없고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데

주변에는 매장문화제 발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듯 곳곳에 표토가 벗겨진 발굴 작업장이 산재해 있는 것이 보인다.

 

 

 

08시05분, 주차장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요기까지 도보로 10분 걸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듯 주차장에 잡초가 자라고 있고 문화재 해설사가 상주하는 듯 하지만 아직 시간이 일러 문은 잠겨있다.

 

관람시간; 10시00분~17시30분 까지 (문화재 해설사 근무)    입장료; 무료

휴관일   ; 월,화요일, 추석 및 설 연휴는 휴관     Tel 052-241-8568.  241-7333

문간채

조선말기인 1884년 12월 7일 울산군 농소면 송정(현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경주.울산의 만석지기 승지 박시규와 여강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100여일만에 백부의 양자가 되고, 1898년 그의 나이 15세에 월성최씨 영백(鉉敎의 장녀)과 혼인했다.

14세 당시 학덕이 높은 왕산 허위(애국계몽사상가)의 문하에 입문하여 정치와 병학을 배우게 되고, 그의 스승이자 의병장 허위선생의 영향은 명사문객들과 교제하며 국제정세를 습득하게 하였다. 1906년 양정의숙에 입학아여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태백산호랑이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었다.
‘을시보호조약’이 성사되면서 박상진은 학교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할 수 없었고, 신돌석과 함께 평해에서 항일 의병항쟁을 일으킨다.

1908년 신돌석이 일제의 교활한 농간에 빠저 순국하고 스승 허위가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 당하는데, 이를 지켜본 박상진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한 후, 홍성에 상경해 김좌진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 결의를 맺는다. 이는 뒷날 김좌진을 대한광복회 부사령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
1909년 ‘양정의숙 법률경제과를 졸업한 박상진은 비밀결사조직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10년 판사등용시험에 합격해 평양 지원에 발령까지 받았으나 결국 부임하지 않고 만주와 연해주, 상해 등지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느낀 것은 ‘한일합방(1910년)으로 나라 잃은 뼈저린 아픔이었고, 일제에 대항하여 의병을 능가하는 군사력과 군사조직을 위한 자금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당시 박상진은 계몽운동과 의병활동을 통한 무력항쟁이라는 양대 전략을 구상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금 조달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1912년 박상진은 삼정물산에 전답을 저당 잡혀 빌린 자금으로 김기덕, 오혁태와 함께〈상덕태상회〉라는 곡물상회를 대구에 설립하여 겉으로는 무역업을 겸한 곡물상으로 속 내용은 독립운동기지 및 각종 연락기관, 자금조달기관으로 삼는다.

박상진은 이후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고, 당시 진행 중이던 중국신해혁명을 본보기 삼아, 국권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대한광복회’를 결성한다. 그의 나이 32세, 1915년(양)7.15일에 일어난 일이다. 대구 달성공원에서 조직된 대한광복회는 총사령에 박상진이, 부사령에 이진룡이 임명되어 활동이 시작되지만, 이진룡의 체포로 의형제 김좌진이 그 뒤를 잇게 된다.

항일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회’는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기본강령을 바탕으로 충청도 . 경기도 . 강원도 . 황해도 등으로 조직을 확대하였다.(1916년)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를 비롯하여 광주, 삼척, 예산, 인천, 용천, 서울, 해주 및 만주의 봉천, 장춘에 설립, 곡물상, 잡화상을 연락거점으로 하여 군자금을 모았고, 친일부호들과 금광, 세금수송 우편마차 등을 대상으로 독립군자금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군자금 조달은 순조롭지 않았고, 결국 군자금 출연을 거절하는 친일부호를 처단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칠곡 장승원처단 사건이다. 이외 벌교부호 서도현 사살, 보성 박곡의 양재성 처단, 대구 서우순에 대한 모금사건 등 조국을 뒤로하고 동포를 버린 친일부호처단은 계속 되어졌다.

1918년 봄까지 11월 장성원 처단사건 이후 ‘대한광복회’는 최대 수난기를 맞게 된다. 1918년초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종국’의 배신은 전국 조직망을 발각 되게 하고, 결국 박상진도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옥살이 끝에 1921년 8월 11일 서른여덟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의 교수대에서 순국했다.

-※모셔온 글※-

 1884(고종 21)~1921.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 호는 고현(固軒). 아버지는 승지를 지낸 시규(時奎)이나, 백부인 교리시룡(時龍)에게 입양되었다. 1902년부터 의병장 출신인 허위(許蔿)에게 배웠다. 1904년(광무 8)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사퇴했다.

1912년부터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세워 독립운동의 군자금 조달 및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1915년 1월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고, 같은 해 7월 15일에는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을 중심으로 결성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에 취임했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이념을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로 하고, 그 방략은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했다. 즉 국내에 100여 개의 거점을 두고 군자금을 모아 무기 및 장비를 갖추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히 혁명을 일으켜 공화주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부호들의 비협조로 성과는 매우 미흡하였다. 심지어 일본친일 부호배들은 군자금 헌납 권유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내막을 일경에 밀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군자금 모금에 부호들이 협조하지 않자 이후로 강제모금을 추진하고 친일적인 부호를 처단하기로 계획했다. 1917년말과 1918년초에 걸쳐 경상북도 칠곡군 부호 장승원(張承遠),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 면장 박용하(朴容夏), 전라남도 보성군의 양재학(梁在學), 낙안군의 서도현(徐道賢)을 처단했다.

그러나 이종국(李鍾國)이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1918년초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채기중·김한종(金漢鍾)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했다. 1960년 울산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천안에는 광복회기공비가 건립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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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아래채와 중문

사랑채와 중문

안채

날개채

곳간채

곳간채 32.95㎡의 내부에 전시 시설 및 영상시설등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관람시간이 되지 않아 걷모습만... 

1917년 만주 부사령으로 파견되는 백야 김좌진 장군을 위한 전별시

 

뒷뜰

 

 

안채에서 바라 본 중문과 사랑채

사랑채에서 본 문간채

우물

08시15분,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등록되어 있으며 1825년 지어진 낡은 생가를 2003년 안채를 시작으로 2008년 1월 조경공사를 끝으로 복원공사를 마무리 하였다고 한다.

주변에 보이는 곳마다 매장 문화재 발굴 공사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