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3년 08월25일 맑음
동행; 이웃사촌
위치;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모처럼 이웃과의 나들이 인데 긴여름 장마와 휴가기간 동안 비 한방울 떨어지지 않더니 요 몇일 전부터 오락가락 큰비는 아니더라도 빗방울이 떨어져 신경이 쓰이더니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
일행중에 발에 입은 가벼운 부상으로 부산 이기대 공원을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경주 양동마을에 09시45분 쯤 도착하니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다.
마을 입구, 방문하는 차량들은 좌측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시키고
경주 시내버스 시간표, 안강에서 252번(양동)버스가 자주 다닌다
주차장 옆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 문화관에는 마을을소개하는 자료가 정리 전시되고 있다
경주시 동북방으로 20km 쯤 위치하고 있는 양동마을은 전국에 6개소의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의 규모라고 하는데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종가와 잘 보존된 문화재와 전통문화, 때묻지 않은 향토성등 볼거리들이 많고 역사적인 내용에서도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로서 500여년 동안 전통을 이어 온 유서 깊은 반촌 마을이다.
1984년 12월 20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제(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31일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되었고 1992년 영국 찰스 황태자가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마을은 주산인 뒷산 설창산 문장봉에서 뻗어내리는 내줄기의 능선과 골짜기로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고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감속편(국보 283호), 무첨당(보물 411호), 향단(보물, 412호), 관가정(보물 442호), 손소영정(보물 1216호)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호)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문중의 세력이 서원이나 정자를 통하여 이루어져 경주손씨 가문에는 숙종 정해년(1704년)에 건립된 동강서원(東江書院) 및 안락정, 수운정 등의 정자와 여강 이씨 가문에는 양졸정, 설천정, 동호정, 심수정, 영귀정, 육위정, 내곡정 등의 정자 및 강학당, 경산서당등이 마을의 곳곳에 흩어져 있다.
10시04분, 마을 문학관 지나면 나타나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하고 몇걸음 더 걸으면 조그마한 초소같이 생긴 곳에서 입장권을 확인한다.
양동 초등학교
1909년3월20일 양좌학교로 설립인가를 받고 1912년 9월25일 양동 공립 보통학교로 개교한지 100년이 넘었는데 현제 7개 학급에 82명의 학생들과 유치원 1개 학급에 9명의 어린이들이 수업을 하고 있다
입구 삼거리에 작은 가게가 보이고
좌측으로 초가집 뒤 높은 언덕에 보이는 기와집이 '관가정'이고
고개를 약간 우측으로 돌려보면 보이는 고와가가 '향단'이다.
마을 전체가 깨끗하게 보이고 담장과 마을을 흐르는 도랑이 현대식으로 축대를 쌓고 너무 잘 단장이 되어 있어 오히려 옛 정취가 조금은 감해진듯 생각이 된다.
향단을 조금 당겨 보았는데 원래 99칸이었는데 6.25때 불타 없어지고 현재 56칸이 남아 있다고 한다.
민속촌에서 드물게 신식건물(오래되어 많이낡았다)
아내와 절친인 지인의 고향 집인데 보수중이라고...
이 마을 가옥의 보수는 정부에서 지원을 해 주고 감독하에서 이루어 진다고 한다.
관광객 들에게 체험을 해 볼 수 있도록 개방이 되어 있는 집의 우물인데 사람이 살고 있어 차마 번거롭게 할 수 없어 대문에서 사진만 찍고 되돌아 나왔다.
근암고택 후문 쪽으로 올라 가다가 되돌아 보고 찍은 마을풍경인데 어린시절 고향마을의 초가지붕과 같은 모습이다.
화장실 인듯하지만 확인 해 보지는않음
근암고택 후(쪽)문
상춘헌 고택
안내판 앞에 서면 해설을들을 수 있는데 우측에 설치되어 있는 보턴을 누루면 중국어 영어 일어로 해설이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서백당(중요 민속문화재 제23호) 경주손씨 종가
마을의 입향조 양민공 손소가 조선 세조 5년(1459)에 지은 집으로 아들 손중돈과 외손인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서백당 향나무, 족히 수백년은 된듯...
화장실, 내부는 현대식 이다.
낙선당.
손소의 세쩨 아들이 분가 할 때 지은집으로 손종로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 왔다고 하며 집주인이 천석꾼이었던 관계로 유난히 곳간이 많다고 한다.
낙선당 곡간체
양동마을의 동북쪽 가장 안쪽에 위치한 창은정사의 사랑채와 중문채(우측)
자신의 성이 신씨라고 소개하는 집 주인의 친절한 안내로 사랑채의 청마루에 앉아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집안 내부를 소상히 살펴 볼 수 있었는데 양동마을의 고와가 들이 모두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을 바라보고 지어졌다고 하고 이집의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가끔 유명 국악인들의 연주회가 열리는 무대로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철종11년에 ㅁ자 형태로 지어진 집 내부의 정원, 우측이 안채이다.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안체의 대청에서 뒷쪽 툇마루로 통하는 쪽문인데 우리 전통가옥에서 도르래가 달린 문은 처음 보는데 오랜 세월에도 원래의 모습 그대로이고
다섯개의 대들보가 지붕을 받쳐들고 있고
봉화 금강송으로 지었다는데 수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전혀 뒤틀림이나 갈라진 곳이 보이지 않는다.
연자방아
일행들과 한참 논란을 했었는데 암수모양을 하고 있으나 짝이 맞는것인지...
경산서당을 지나 마을 길을 따라 능선에 오르니 안락천을 지나 안강 들판과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 설창산을 오르는 길이 보인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여강이씨의 종가
회재 이언적이 종가의 별당으로 경상감사 재직시에 지어지고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거주 하였다고 하며 제사와 독서,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하고 맏손자인 이의윤의 호에서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안체
대청에 편액이 여러개 걸려있는데 '좌해금서'이라는 편액은 흥선 대원군의 글씨라고한다.
안체와 무첨당사이에 보이는 사당
무첨당을 탐방하고 점심을 먹기위해 물봉골 도로를 따라 내려오며 바라본 경치인데 초가지붕 뒤로 보이는 기와집이 심수정 인듯...
연꽃
요기식당에 들러 민속주를 곁들인 연밥으로 점심을 먹고
수련
양동마을이 토종견 '동경이' 사육마을이라는데 언제쯤인지 T.V에서 소개되는 것을 본 생각이 난다.
물봉골에서 향단으로 가는 지름길
마을 회관, 회관 뒤쪽 숲속에 '이향정'의 지붕이 살짝 보인다.
ㅡ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며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실제 남자가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ㅡ <경주 양동마을 홈>
향당의 대문은 굳게 잠겨있어 출입이 불가...
몰지각한 탐방객들이 신발을 신은체 대청마루에 올라 가 기웃거리는 무례한 행동으로 화가 난 주인이 대문을 닫아 버렸다고 한다.
사람이 거주하는 개인의 집을 탐방객들에게 개방하고 구경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폐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할 것인데...
어느 단체나 모임에는 목소리 크고 안하무인인 사람들이 꼭 한 두명씩 끼여 있는데 구성원들은 그런 사람을 자제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 같은 행동에 동조를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사람이 모임의 중심이 되는 경우도 많다.
향단(보물 제412호)
회재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시 병환 중인 모친을 돌볼 수 없어 중종이 지어준 건물로 이언적이 동생인 이언괄에게 주고 이언괄의 손자 향단공 이의주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여강이씨 향단파의 종가라고 한다
원래 99칸이었던 것이 6.25 때 소실되고 56칸만 남아있다.
관가정(보물 제442호)
손소의 둘째 아들 중종 때 우재 손중돈의 옛집으로
너른 들판에 농사짖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으로 앞 쪽이 탁트이게 지었다는데 앞쪽에도 담장이둘러쳐져 있다
관가정 사당
고와가(古瓦家) 마다 사당이 지어져 있는데 이곳 관가정에도 안체의 동북쪽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관가정에 있는 향나무가 용틀임을 하는 듯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
청동기 시대 석관묘가 마을의 안산인 성주산 정상의 구릉지에 100여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BC 4C 이전)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 되었고 이웃마을 안계리에도 고분군(古墳群)이 있는것으로 보아 상당히 세력이 있는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양동마을 홈피-
관가정에서 출구쪽으로 내려오면 우측에 있는 정충비각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손종로(1598-1636)와 노비 '억부'와 함께 이천 쌍령전투에서 전사를 하였지만 그들의 시체를 찾지 못하여 옷으로만 장사를 지냈다고 하고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7년(1783)에 정충비각을 세웠다.
억부를 기리는 '충노각'에는 비석이 없고 위치도 손종로를 기리는 '정충각'보다 낮게 세워져 있고
손종로를 기리는 정충각 안에는 비석이 서 있고 건물을 세운 축대도 충노각에 비해 조금 높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죽어서도 신분의 굴레를 벗어 날수가 없는 모양이다.
정충비각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마을 입구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시원한 아이스 케익을 하나씩 입에 물고 더위를 식힌다.
휴식을 하고 있던 MTB를 타고 온 여러사람들이 마을 안으로 출발을 하고 일행들도 매표소를 지나 마을 문화관 뒤 출입구를 거쳐 주차장에 도착한다. 15시00분
오어사
양동마을을 탐방하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멀지 않은 포항 8경 중의 한곳이라는 오어사를 찾아 갔다.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가 보이지만 장마에도 비 한방울 오지 않는 가믐으로 저수지의 수량이 많이 줄어 아름다움이 많이 퇴색이 되었지만 주차장과 좁은 도로 갓길에는 승용차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다.
자장암
잠시 휴식을 하며 보니 계곡건너편 사면에 한뿌리에서 두 줄기로 자란 가지가 중간에 연결이 되어 있는데 다른 뿌리에서 자라 가지가 연결된 것은 연리지라고 하던데 요런걸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원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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